책이 익어 가는 풍경

사는 이야기/길을 걷다 2010/06/10 01:16 Posted by G_Gatsby

저녁 무렵이 되면 사거리 큰 길가에는 과일 파는 트럭 두 대가 어김없이 서 있다.
모퉁이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는데 영업에 부담을 느끼는지 서로의 시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있다. 이쪽에서 걸어 오면 과일 파는 트럭이 하나만 보이고 저쪽에서 걸어와도 마찬가지다. 불법 노점이 분명한 것이지만 휴일을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보는 풍경이라서 꽤 익숙하다.

한쪽 트럭에는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아저씨가 장사를 하고, 또 다른 트럭에서는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장사를 한다. 투박한 아저씨의 영업 방법은 간단하다. 가격을 물어보고 사는 손님에게 아무말 없이 덤을 몇개 더 얹어 준다. 더 준다는 말도 없이 습관적으로 몇개를 더 넣는다.

등산복 아주머니의 영업방법은 조금 다르다.
지하철 출구로 나오는 손님에게 과일을 권한다. 그러다가 한 봉지를 사려는 손님이 있으면 두봉지에 얼마라며 좀 더 싼 가격을 내놓는다. 그래서 결국 두개를 판다. 아저씨의 트럭에는 아주머니의 손님이 많고, 아주머니의 트럭에는 아저씨 손님이 많다. 

서로 다른 풍경이긴 하지만 비슷한 풍경도 있다.
손님이 뜸해지는 밤이 오면 트럭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책을 보는 모습은 똑같다. 아저씨는 자그마한 성경책을 꺼내서 읽고, 아주머니는 커다란 소설책을 꺼내어 본다. 책을 보다가 손님이 오면 반갑게 나가 과일을 팔곤 한다.



비가 올듯 말듯 흐린 어느 저녁날 아저씨의 트럭 앞을 지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 때문인지 길을 걷는 손님도 뜸해지고 있었고, 아저씨는 어김없이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성경책을 보고 있었다. 성경책을 보는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 진지했다. 고단한 일상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인지, 다음 세상의 희망을 꿈꾸며 읽는 것인지는 알수 없다. 무표정한 표정이었지만 눈가에 서려 있는 총기를 느낄수 있었다.

서점에 들러 책을 몇권 샀다. 
서점의 가판대에는 돈과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즐비했고, 남자와 여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잡지들이 많았다. 곱상한 아주머니가 부동산 투자에 관한 책을 골라서 계산을 한다. 말끔한 청년이 경제잡지와 만화책을 골라서 계산을 한다. 책들은 화려한 문구와 어휘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책을 사고 나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돈을 많이 벌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아저씨의 트럭앞을 지나간다.
성경책을 읽던 아저씨는 누군가와 함께 비가 흐르지 않는 상점 처마밑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 트럭을 바라보는 아저씨의 담배 연기가 독하고 심란스럽다. 옆을 지나가는데 아저씨가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우리같은 트럭커가 갈곳이 뻔한데..."

트럭커가 무얼까 잠시 생각해 본다. 트럭과 리어커의 합성어일까..아니면 트럭으로 노점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까. 생각을 해봐도 답을 찾을순 없다. 아저씨의 트럭으로 다시 돌아가 참외를 골라 본다. 담배를 태우던 아저씨가 재빨리 뛰어와서 옆에 선다.

까만색 양복에 노란색 참외봉지를 양쪽에 들고 터벅터벅 걷는다. 아저씨가 덤으로 몇개를 더 주는 바람에 제법 무겁다.

책 읽는 트럭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넣어 본다.
누군가는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으려 책을 읽고, 누군가는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책을 읽는다. 또 누군가는 현실의 고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 책을 읽고, 또 누군가는 갈 곳없는 세상에 홀로 남아 책을 읽는다. 어떤 이유에서 책을 읽더라도 우리 역시 갈 곳은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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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2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10/06/12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2 1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화 '시'는 꼭 한번 봐야겠군요.ㅎㅎ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참 좋네요. 비가 오고 월드컵이 열리니 윗층에서는 실내축구를 하나봅니다. 드리볼 하는 소리가 쿵쿵 하고 들리네요.^^

  3. Favicon of http://usedbooks.tistory.com/ BlogIcon 헌책방IC 2010/06/12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늦잠을 자고, 그리스전을 할 때까지 집에서 밍기적 댈 까 하다가... 오늘 해야겠다고 미뤄둔 일이 있어, 우산을 쓰고 저벅저벅 도서관에 왔습니다.
    오는 내내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모두 잊고 집중할 수 있을 거라, 그렇게 제 몸을 믿었는데... 이 몸둥아리가 저의 믿음과 다릅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하면 되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일까지만 끝내면 되니까.. 그런 생각과, 그래도 오늘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해놔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더랬습니다.
    혹시 일을 빨리 끝낼까 싶어, 가방에 책 한권을 넣어 왔는데, 아마도 이 책이 발단이 된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가방에 넣어 두고, 다른 것을 하려니까 몸이 반항을 하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몸이 원하는데로 해야 겠습니다.
    저 아저씨나, 저 아줌마. 장사가 잘 되면 좋겠네요.^^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2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책에 빠지면 다른게 손에 잘 안잡히죠^^ 저도 그런 경우가 참 많았었습니다. 트럭커가 책을 보는 모습은 저에게 작은 감동이었네요. 어쩌면 아저씨의 손에 든 작은 성경책이 아저씨의 삶을 지탱하고 있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좀 있으면 축구를 하는군요. 그리스..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 오늘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4. Favicon of http://garimtos.tistory.com/ BlogIcon 가림토 2010/06/12 14: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채식하는 영혼을 꿈꾸는 트럭커의 주종목은 역시 과일이군요. 과일은 채식인가요? 으으흐흐흐~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3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일을 많이 먹긴 먹어야 하는데, 사실 잘 먹진 못합니다.^^ 어디엔가 자리잡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트럭커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5. K. 2010/06/12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어만 가는 책들을 주체할 수 없어서 주문한 책장이 도착했네요.
    이사짐으로 들어 온 박스 속의 책들을 정리하면서 듣는 빗줄기 소리가 유난히 더 시원스레 들립니다.
    사실, 이 박스들을 쳐다 볼 때마다 갖고 들어 온 걸 후회하곤 했거든요.ㅎㅎ
    책욕심에 오늘도 중노동중입니다.^^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3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책장 정리할때는 흐뭇하죠.^^ 더군다나 빗줄기가 졸졸 흐르는 날이면 더 좋은것 같습니다. 깜끔하게 정리하고 나면 머릿속이 정리된 느낌이 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6. Favicon of http://reignman.tistory.com BlogIcon Reignman 2010/06/14 0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거인들이 잘 먹지 못하는 음식이 과일이죠.
    특히 수박의 경우 집에서 먹는 일이 거의 없자나요. ㅎㅎ
    그래도 과일 잘 챙겨서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잘 익은 과일을 보는 것처럼 책이 익어 가는 풍경 역시 왠지 흐뭇해지는군요.
    트럭 몰고 다니며 장사하는 분들 보통은 라디오를 듣더라고요. ㅎㅎ
    아무튼 즐거운 주말도 지나갔습니다.
    새로운 주말까지 활기찬 하루하루 보내세요.
    주중에 아르헨티나전도 재미있게 즐기시고요. ^^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4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같은 독거인이라 수박을 먹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하시는군요.ㅎㅎ 책이 익는 풍경이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드네요. 우리가 갈곳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하네스 버그로 출발하셨겠군요. 아무튼 화이팅 입니다.^^

  7. Favicon of http://befreepark.tistory.com BlogIcon 비프리박 2010/06/14 1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저씨 트럭에서 과일을 사셨군요.
    역시 두 봉지 주는 아주머니 트럭에선 살 수가 음따는.
    혼자 다 먹어치워야 하는 '독거 청년'이라 하실 듯.

    트럭커라고 하면 그냥 트럭 모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리어카와의 결합일 수도 있겠단 슬픈 생각이 드네요.
    트럭으로 바뀌었을 뿐 예전 리어카로 장사하시는 분들과 다르지 않은. -_-;

    책을 읽는 건 왜일까 라는 물음을 갖게 되네요.
    성경 읽는 트럭 아저씨, 소설 읽는 트럭 아주머니가 더 와닿네요.
    책의 주제 마저 돈에 매몰되어 가는 출판 풍토나
    책의 선정 마저 돈에 함락되는 독자 풍토를 봐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힘찬 한주 시작!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4 2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 아주머니가 딸기 두봉지를 아주 싸게 주셨는데..2/3이 썩어 가더군요.. 그 뒤로는 잘 가질 않습니다.^^ 저도 책을 왜 읽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취미일수도 있고, 절박한 심경에서볼수도 있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볼수도 있고 말이죠. 가끔은 지적인 배고픔을 책속에서 찾는것도 좋지만, 세상속에서 배고픈 정을 채우는것도 좋은것 같네요.ㅋ^^

  8. Favicon of http://onlocation.tistory.com BlogIcon 빈상자 2010/06/14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 있는 직업이 있나 잠시 생각해 봅니다
    언듯 그럴 듯해 보이는 그런 직업이 실상 제가 원하는 것인지는 또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네요
    하루 종일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직업이 없나 고민하던 옛 유행가도 생각이 나지만
    무엇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결국 궁극적인 질문이겠죠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4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설에 빠져있을때 그런 생각 참 많이 했어요. 하루종일 책만 보면 얼마나 좋을까..하루종일 그녀를 바라 보는 직업은 스토커나 파라라치 정도가 있겠군요. 모두가 적성에 맞는 직업은 아니군요.ㅎㅎ 삶에 대한 질문은 결국 돌고 돌아 원론적인 것에 도달하는것 같습니다. 10대의 삶, 20대의 삶, 30대의 삶...

  9. Favicon of http://badaherstory.tistory.com BlogIcon 바다애미 2010/06/14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저는 초등 4학년 이후로 코 박고 읽은 책이 없어서리...
    저 같이 게으른 부류들은 이런 세상을 꿈꿉니다.
    '책이 익'으면 종이 위 노릇노릇해진 글자들이 종이에서 하나씩 떨어져나오고 그걸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마다 책에 대한 정보가 자동으로 뇌에 저장되는.. 딸기맛 책이 나오는 세상.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4 2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코를 박고 책을 읽기엔 코가 너무 크지 않을까 싶네요. 책이 익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안 요리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시는 보면 역시 무언가 다른 포스가 느껴지는군요. 그렇다면 깡마른 사람과 비만인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아주 쉬울수도 있겠네요.^^

  10. 2010/06/15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Favicon of http://earthw.tistory.com BlogIcon 지구벌레 2010/06/15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버지가 한때 전국을 다니며 트럭에 과일을 싣고 팔러 다니셨죠.
    몇번 따라 나선 적이 있었는데..역시 쉽지 않더군요.
    조금은 약아야 장사도 하는데..아버진...늘..어색해하셨다는..^^.

    • Favicon of http://www.yetz.kr BlogIcon G_Gatsby 2010/06/16 0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격이 맞는 분들이 있는것 같아요. 결코 쉬운일은 아니더군요.^^ 트럭에서 바라보는 비오는 풍경이 그려지네요.^^

  12. 2010/06/18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